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를 역사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부하는 강화도 '스토리워킹'에 참가하였습니다.
인천 검암역 1번 출구 앞에서 준비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강화도 <용흥궁공원>으로 출발합니다.
우리가 참가하는 투어코스는 전체 3가지 코스중에서
'독립운동길 투어'입니다.
용흥궁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스토리워킹> 깃발을 찾아서 역사해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문화재보호구역이라 5층이하 건축 고도제한이 있다고 합니다.
용흥궁은 25대철종이 살았던 곳이라 지금의 화려한 기와집을 보면서 짐작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이되기 전 5년을 살았는데
실제로는 아주 소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한옥 담장안에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보입니다.
실제로 안에는 범종, 종각, 보리수나무가 있어서 혹시 절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공회성당>입니다.
지붕위 꼭대기 십자가가 보입니다.
강화도에서 강화읍을 제일 모른다고 하는데 스토리워킹 투어를 통해서 강화도에 대해 잘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멀리 강화도의 동문성곽이 보입니다.
강화도를 이해하는 역사적배경을 보면
1232년 고려시대에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던 시기는 최우 무신정권 집권기 였습니다.
개성의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라는 최우의 협박에 고려 고종황제가 수락하게 되므로써
1232~1270년 까지 39년간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가 되었고 몽골군과의 대적 중 화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강화읍 전체가 고려궁지가 있던 마을로 밝혀지고 있고 7km 걸쳐 강화 4대문이 다 있다고 합니다.
강화도 3.1운동의 유적 기념물이 용흥궁 공원에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강화도에서 2만여명이 참가 했다고 합니다.
신미양요를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이 있습니다.
드라마 처럼 실제로 미군장교가 남긴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세번의 전투중 마지막 전투인 광성보전투의 기록인데, 미군함이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선포격을 했고
그는 '이렇게 한 곳에 많은 화력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고 남겼습니다.
그때 돈대 위에서 생각지도 않은 노랫소리(멜랑꼬리송- 구슬픈노래-역사가는 만가라고 표현했다.)가 들려왔다고 적었습니다.
만가 라는 의미는 아마도 '죽은 전우는 보내고 나도 곧 따라가리라.'는 비장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또 기록에는 '탄약이 떨어지니 흙을 던지고 돌을 던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 미군이 쓰던 총은 단발총이고 이것은 조준사격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조준하는 미군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흙과 돌을 던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의 포지진과 덕진진의 포격을 경험한 조선의 군인들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을 다 알고 있었고
비교 불가한 전력의 차이를 알고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군인들은 대다수가 강화도 주민이었고 후방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으로써 맞써 싸웠던 것입니다.
<심도직물>
1947년에 설립해 2005년까지 역사를 이어오던 심도직물 터의 굴뚝 유적이 있습니다.
강화초등학교는 3.1운동의 주역들이 이 학교 학생들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64년 지정 된 '고려궁지' 유적지 입니다.
688년 된 은행나무
이 동네의 도로명도 궁골길 입니다.
금융상사 유적
당시 고증 안되고 연구 발굴 안된 상태에서 유적지 선지정 후 연구 발굴이 되었고 현재도 연구중이라고 합니다.
사학계에서는 이 마을 전체가 고려궁지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려궁궐은 대한민국에는 여기 한곳뿐이고,
북한 개성에 만월대가 고려 궁궐 유적이라고 합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70일동안 강화도로 피난오게 되면서 조선의 행궁이 강화도에 있었는데
이 곳은 배산 임수의 명당의 터라고 합니다.
명당인 증거는 북산(송악산이라는 이름) 과 개성 만월대를 본따서 만든 흔적들로 말미암아
작은 만월대를 만들었음을 알수 있다고 합니다.
내려다 보이는 48번 국도가 복개천으로 동락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동락천을 통해 배가 들어왔고 강화직물을 수송해서 나를 수 있었기에
강화도의 경제가 호황을 누릴 수 있던 배경이 되었습니다.
<잠두교회>
1901 존스목사가 설립한 잠두교회와 세운 학교 합일초등학교가 보입니다.
당시에는 '잠두의숙'이라고 불렸습니다.
김구와 함께 활동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청산리 이범석 장군의 휘호와
김구 선생의 친필이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종교를 민족구원의 문화적파워 인적 네크워크로 접근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강화진위대'가 일본에 의해 해산되었을 때 한양에서 첫전투가 있었고
그 다음에 원주와 강화에서 두번째 전투가 있었고 조선 의병의 기세가 강화도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동휘 선생은 보창학교에서 체육시간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으니
강화초등학교 학생들이 3.1 만세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대명헌>은 김구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유적입니다.
1920대 전후 김구선생이 인천 감옥에서 첫번째 감옥생활을 할 때,
'김주경'이라는 강화도 사람이 '김창수'의 면모를 보고 전 재산을 바쳐 구명활동을 로비를 펼쳤다고 합니다.
김주경은 김구에게 시 한편을 남기고 조국의 미래를 위해 탈옥하라고 했고,
결국 탈출에 성공해서 김주경을 찾아 '대명헌'에 들렀지만 김주경은 강화도에 없고
블라디보스톡에 갔다는 말만 듣게 되어 안타까워 했다고 합니다.
김구는 강화도에서 김진경 아들과 동네사람들을 모아 3개월간 서당을 열기도 했고
해방후 1947년 이곳 '대명헌'을 재방문 하게 되었고 강화도 유지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1928년 지금 모습으로 개축된 대명헌의 모습으로 전해지며 당당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발자취가 머무른 대명헌.
당시 유행한 2층 한옥
1920년대 만들어진 이 유리는 밤에 화려한 아름다운 색을 발한다.
김구 선생이 묵었던 사랑방
한옥스테이도 운영중이다.
강화읍사무소 앞에 강화관광플랫폼이 있습니다.
고려궁지 근처에서 맛본 젓국갈비
토요문화한마당 플리마켓
강화 토요문화 한마당
강화시티투어와 스토리워크를 통해 역사를 깊이 배울 수 있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인천교육청 학부모기자단 방민정-